"충청 대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Guanfengmei (토론 | 기여) (→주요 인물) |
Guanfengmei (토론 | 기여) (→주요 인물) |
||
| 251번째 줄: | 251번째 줄: | ||
*** 송시열은 여덟살 때부터 친척되는 송이창(宋爾晶)에게서 글을 배움. 송이창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아버지인데 그때부터 공은 자기보다 위인 송준길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일생을 두고 학문과 정치 생활에 있어 그와 고락을 같이 하는 사이가 됨. | *** 송시열은 여덟살 때부터 친척되는 송이창(宋爾晶)에게서 글을 배움. 송이창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아버지인데 그때부터 공은 자기보다 위인 송준길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일생을 두고 학문과 정치 생활에 있어 그와 고락을 같이 하는 사이가 됨. | ||
* 이은농(李應魯)(1904~1989)<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응노[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94]</ref> | * 이은농(李應魯)(1904~1989)<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응노[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94]</ref> | ||
| + | [[파일:이응노.png|100px|섬네일|오른쪽|이응노]] | ||
** 본관: 전의(全義,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 | ** 본관: 전의(全義,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 | ||
** 호: 죽사(竹史), 고암(顧菴), 고암(顧庵) | ** 호: 죽사(竹史), 고암(顧菴), 고암(顧庵) | ||
| 265번째 줄: | 266번째 줄: | ||
** 관련 장소 | ** 관련 장소 | ||
*** 단재신채호선생생가지(丹齋申采浩先生生家址),대전 중구 단재로229번길 47 (어남동) | *** 단재신채호선생생가지(丹齋申采浩先生生家址),대전 중구 단재로229번길 47 (어남동) | ||
| − | [[파일:신채호.png|섬네일| | + | [[파일:신채호.png|섬네일|오른쪽|신채호]] |
== 농특산물 == | == 농특산물 == | ||
2025년 12월 18일 (목) 06:20 판
답사지
- 계족산성
- 대전시 장동 계족산(해발420m)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이 산성은 백제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98∼99년 발굴을 통해 신라에서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산성의 높이는 약 7∼10m 가량 되며, 동·서·남쪽에 문터를 만들었다. 성 안에서 삼국시대에 만든 큰 우물터가 발견되었고, 성내 건물터에서는 고려시대 기와편과 조선시대 자기편이 발견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쌓기 방법은 보은에 있는 신라 삼년산성(사적)과 같은 방식으로 쌓았다는 것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고, 출토된 토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이 6세기 중·후반의 신라토기임이 밝혀졌다. 이후에 나온 토기 형태도 백제계는 소수이며 다수의 신라계 토기가 보여, 한때 백제가 점령하긴 했지만 신라에 의해 만들어진 산성으로 조사되었다. 계족산성은 새로운 발굴 성과에 의해 신라가 쌓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아직도 논란이 있으며, 6세기 중·후반 신라나 백제에 의해 만들어진 산성으로, 당시 대전지방이 가진 전략적 중요성을 보여준다.[1]
- 회덕향교
- 회덕향교는 조선 초기에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때 중건되었다. 그 후 1812년(순조12)에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제사의 공간인 대성전, 교육의 공간인 명륜당 등이 있다.[2]
- 회덕 동춘당
-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선생의 별당(別堂)이다. ‘동춘’은 ‘늘 봄과 같다.’는 뜻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유형으로,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크지 않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평면으로는 총 6칸 중 오른쪽 4칸은 대청마루이고 왼쪽 2칸은 온돌방이다. [3]
- 신중앙시장
- 대전근현대사전시관(구 청남도 청사 1935)
- 대전근현대사전시관은 대전시립박물관에서 운영하는 전시관으로 1932년 건축된 라의 대표적인 근대건축물인 옛 충남도청사 본관 1층에 자리하고 있다. 1930년대 초 건축물 중 보기 드물게 원형이 잘 보존된 근대문화유산을 활용한 근현대사전시관에는 건축물관 관람과 함께 상설전은 물론 대전 근현대사의 많은 사건들과 역사, 건축, 도시계획, 디자인, 대중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특별전을 만나볼 수 있다.[4]
- 진잠향교
- 조선 태종5년(1405)에 창건된 진잠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양재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외삼문 안쪽의 양옆에 동서양재가 서로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고 안쪽에 학문을 가르치던 명륜당이 자리잡았다. 또 명륜당 뒤로 내삼문을 거쳐 들어가면 높은 대지에 대성전이 위치하고 있다. 이중 대성전은 겹쳐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는데 단아하면서도 고상한 멋을 느끼게 한다. 평면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으로 되있다. 명륜당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고 바닥은 대청을 만들었으며 우측 1칸은 온돌방으로 설치됐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 지붕으로 뒤쪽 대성전의 지붕 및 앞쪽 외삼문의 지붕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외삼문 안 양재 건물은 정면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잠향교의 건물들은 당초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한편 진잠향교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설치되어 있고 하마비(下馬碑)도 세워져 있어 조선시대 향교의 위상과 배치 구조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진잠향교는 중국의 공자와 4아성 6현과 우리나라의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음력 2월 8월의 상정일 上丁日)로 제향을 지낸다.[5]
- 유성온천
- 유성온천지구는 대전 원도심에서 서쪽으로 약 11km가량 떨어진 유성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대단위 온천관광타운이다. 한국 116개의 온천지구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와 부존량, 사용량에서 한국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유성의 온천수는 50~400m로 구성된 화강암 단층 파쇄대에서 생성된 물로 지하 200m 이하에서 분출되는 27~56℃ 정도의 고온 열천이다.[6]
- 유성온천에는 '백학(白鶴)전설'이 있으며,전설에 따르면 백제 말기에 홀어머니를 모시던 젊은이가 전쟁에 끌려가고, 어머니는 그의 무사 귀환을 기도했다. 아들이 중상을 입고 돌아오자, 어머니는 날개를 다친 학이 뜨거운 웅덩이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날아가는 것을 보고 아들을 그 웅덩이에 넣어 치료하였고, 그는 곧 나았다. 사람들은 이곳을 명학소(鳴鶴所)라 부르게 되었고, 학이 날아가 앉은 곳은 학하리라고 불렀다.
동국여지승람은 조선왕조의 태조가 새 왕도 후보지를 물색하려 계룡산에 들렀다가 이곳에서 목욕하였다고 전하며, 태종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후 여행객들과 지역주민만 이용하는 소규모 온천장으로서 명맥이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대규모 개발되었으며, 광복 후 꾸준히 성장해 199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1990년대에는 가족 단위 휴양지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1999년 관광특구 해제와 워터파크 등 경쟁시설 증가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2010년대 도안신도시 개발로 인해 관광지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다. 다수의 대형 호텔이 폐업했으며, 현재는 과거의 명성이 퇴색한 부도심 및 원룸촌 형태로 변모했다.[7]
- 답사사진집
- 계족산성
- 중앙로-목척교-구청사
지역 개요
대전의 뜻과 유래
- 대전(大田)은 큰 밭이라는 뜻이다. 대전(大田)은 한국말인 한밭이 한자화된 이름이다. 한밭으로 부르던 이름이 조선 초기에 이르러 한자인 대전(大田)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한밭의 한은 크다는 뜻임. 그래서 한의 대(大)로 번역하고, 밭은 한자로 전(田)을 사용하여 대전(大田)이 되었음. [8]
지역 지리
- 대전광역시는 대한민국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세종특별자치시, 북동쪽으로 충북의 청주시·보은군, 동쪽으로 옥천군, 남쪽으로 금산군, 남서쪽으로 논산시·계룡시, 서쪽으로 충청남도 공주시와 접함.
- 서울까지는 167.3km, 부산까지는 238.2km, 광주까지는 169km의 거리에 있는 남한의 심장부에 위치하여 중도라고도 불리움.
- 경부·호남·대진고속도로, 국도 및 철도가 경부선과 호남선으로 분기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로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어 대전은 더욱 교통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함.
- 대전의 행정구역은 대전부가 1949년 대전시로 개칭된 때 35.7㎢ 이었고, 1963년에 88.21㎢이었으며(대덕군 유천면 전 지역과 산내면·회덕면 일부가 편입되었음), 1983년에는 203.80㎢(대덕군 회덕면·유성읍 전역과 구즉면·탄동면·기성면·진잠면 일부가 편입되었음)의 면적에 2구 60개 행정동으로 시세가 확대되었다.
- 1989년 대덕군 편입과 함께 대전직할시로 승격, 5개 구로 설치되었으며, 1995년에는 대전직할시에서 대전광역시로 명칭 변경되었다.2024년 12월 말 행정구역은 539.7㎢, 이중 면적은 유성구가 176.6㎢로 가장 넓고, 인구는 2024년 12월말 현재 관공서, 상업시설이 밀집되고 주거 및 교육시설이 밀집된 서구가 457,951명(외국인 제외)으로 가장 많다. 동구·중구·서구·유성구·대덕구 등 5개구 82개동으로 행정조직이 편성되어 있다.
- 인구 현황[10]
- 거주 인구 총수:1,442,228명(2025.9월기준)>서울: 9,318,500(2025.9월기준)[11]
- 구역별 인구 분포: 서구(463,776명, 32.2%)>유성구(366,516명, 25.4%)>중구(226,046명,15.7%)>동구(219,546명, 15.2%)>대덕구(166,344명, 11.5%)
- 내국인(1,531,809명, 2014년)> 내국인(1,439,157명, 2024년), 6% 감소; 외국인(15,658명, 2014)<외국인(26,249명, 2024년), 67.6% 증가
- 출생: 12,927명(2014년)<6,695명(2024년), 48.2% 감소; 사망: 5,962명(2014년)<8,076명(2024년), 35.5% 증가
- 거주 인구 총수:1,442,228명(2025.9월기준)>서울: 9,318,500(2025.9월기준)[11]
- 산업구조[12]
- 서비스업(76.3%)> 광업제조업(16.7%)> 건설업(6.4%)> 전기·가스·증기 및 공기조절공급업(0.6%)> 농림어업(0.1%)
- 항구를 끼지 못했지만 도시로 교통의 편리와 서울과 가까운 이점 때문에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착실한 공업 성장 양상
- 근대 공업단지의 발달
- 제1공업단지(1973년) : 동구 대화동
- 제2공업단지(1978년) : 동구 대화동
- 대덕 연구 단지(1973년) : 대덕구
- 공업단지의 주요 공장
- 조폐공장 : 1958년에 부산에서 대전의 피혁공장 부근으로 이설. 1982년에 유등천 오염 문제 때문에 부여군의 금강 하류 지역으로 이설.
- 족보 인쇄 공장 : 인쇄업으로 이름남
- 동아 연필회사
- 삼천리 연필 공업사
- 공업단지의 기업
- 대전 방직공장 : 1952년
- 대전 피혁 주식회사 : 1917년 설립, 1963년 효성 그룹 인수
- 현대 공업단지의 발달
- 대덕연구개발특구(Daedeok Innopolis) :1973년 대덕연구단지로 시작됨
- 범위:
- 유성구: 죽 동, 궁동, 어은동, 구성동, 노은동, 하기동, 수남동, 외삼동, 신성동, 가정동, 도룡동, 장동, 방현동, 화암동, 덕진동, 자운동, 전민동, 문지동, 원촌동, 봉산동, 탑립동, 용산동, 관평동, 송강동, 금고동, 대동, 금탄동, 신동, 둔곡동, 구룡동 일원
- 대덕구: 문평동, 신일동 일원
- 대덕연구개발단지 특구 배치도
- Ⅰ지구 대덕연구단지
- Ⅱ지구 대덕테크노벨리
- Ⅲ지구 대덕산업단지
- Ⅳ지구 북부 그린벨트 지역
- Ⅴ지구 국방과학연구소 일원
- 연구소기업 447개(2022년 12월 기준)
- 첨단기술기업 137개(2022년 12월 기준)
- 범위:
- 대덕연구개발특구(Daedeok Innopolis) :1973년 대덕연구단지로 시작됨
자연 지리[13]
- 시의 서북쪽에 계룡산, 남서쪽에 구봉산, 남동쪽에 식장산, 동북쪽에 계족산 등 일련의 산지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분지 상에 발달한 도시이다. 수계는 대전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계를 중심으로 남북방향을 보이며 서부에서는 갑천과 합류하여 북류한후 금강과 합류한다. 대전분지 중앙의 하천연변에는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되어있고 이 충적지와 분지주변의 산지사이에는 경사가 극히 완만한 산록완사면이 발달되어있어 충적지와 함께 농경·거주·산업활동의 기반이 되어왔다. 대전의 지형은 크게 보아 분지의 중앙으로부터 하천유역의 충적지, 산록와사면 배후산지 등으로 이루어졌음.
- 지형과 산맥
- 대전의 지형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사이에 있으면서 식장산, 보문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으로 산지는 동·서·남쪽 방향에서 뚜렷이 드러나 있음.
- 동쪽: 동구 세천동으로부터 함각산(314.5m), 개머리산(365m), 계족산(423m), 고봉산(309m), 식장산(580.67m)등이 충청북도 옥천군에까지 이어짐.
- 서쪽: 우산봉(573.8m), 도덕봉(534m), 관암산(526.56m), 백운봉(536m), 빈계산(415m)등 계룡산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산계가 논산군 두마면까지 이어짐.
- 남쪽: 보문산(457.3m), 구봉산(264m)이 동서방향으로 불규칙한 산릉을 이룸.
- 북쪽: 금병산(364m)이 있고 그린벨트와 녹지지역이 전체 면적의 75%에 달하여 청정한 자연환경을 이룸.
- 지형과 하천
- 대전천·유등천·갑천이 북류 혹은 북동류하여 시의 북동부 지점에서 금강 본류로 유입하고 이들 하천 주변의 평지를 중심으로 시가지가 발달해 있다.
- 기후
- 여름은 덥고 겨울에는 추운 대륙성 기후특성
- 연평균 기온: 13.1˚C
- 연평균 강수량: 1,458.7mm
- 8월 월평균기온: 26˚C(서울 34℃정도), 1월 월평균기온: -1.0˚C(서울 –9.7℃정도)
- 연교차: 27˚C
- 최고기온: 39.4˚C(2018. 8. 15), 최저기온: -19.0˚C(1969. 2. 6)
참고문헌
행정구역 변천
조선시대 이전
- 마한시대: 신흔국(후한서 동이전, 위치: 유성구 계산동·대정동 부근)
- 백제시대: 우술군(우술군, 노사지현, 소비포현) 황등야군(진현현)
- 신라시대: 비풍군(유성현, 적오현), 황산군(진잠현)
- 고려시대: 공주목, 회덕군, 유성현, 진잠현, 덕진현, 충순현(1176 ∼ 1177, 명학소의 난 시기)
조선시대
- 조선시대: 공주목 유성현·회덕현·진잠현에 속했다. 당시까지의 대전은 행정리가 아닌 자연마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 (1)회덕현 [16][17][18]
- 백제: 우술군(雨述郡),또는 후천군(杇淺郡)
- 통일신라시대: 비풍군(757년(경덕왕 16)
- 고려시대: 회덕현(공주(公州)에 예속)
- 조선시대: 회덕현(태종 13년)
- 대한제국: 회덕군(고종32년(1895년))
- (2)진잠현 [19][20]
- 백제: 진현현(眞峴縣), 또는 정현(貞峴)
- 통일신라시대: 진령현(鎭嶺縣) 757년(경덕왕 16)
- 고려시대: 기성부(杞城府)
- 조선시대: 진잠현(940년(태조 23)에 유성 5면을 공주로 예속시켰고 남아 있는 5면만 진잠현으로 고쳤으며, 1018년(현종 9)공주에 예속시켰다)
- 대한제국: 진잠군(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였음)
- (3)유성현 [21][22]
- 백제: 노사지현(奴斯只縣)(우술군에 속함)
- 통일신라시대: 유성(비풍군(比豊郡)의 영현)
- 고려시대: 노사지(奴斯只)(공주에 속함)
- 조선시대: 노사지(奴斯只)(공주에 속함)
- (1)회덕현 [16][17][18]
-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회덕군 산내면 대전리’라는 행정리로의 개편 때가 처음이다.
일제강점기
- 1914년: 대전군:총독부령 제 111호로 도(道)의 부군면(府君面)의 폐합을 단행회덕군,진잠군, 공주군의 현내현을 폐합하여 대전군을 설치. 대전, 외남, 산내, 유천, 동, 북, 유성, 구즉, 탄동, 진잠, 기성의 12개면을 관할(군청이 회덕(현 읍내동)[23]->대전군 대전면(현 동구 원동) 이전)
- 1917년: 대전면(외남면의 대전리, 수침리, 대흥리, 목척리, 발암리,부사리 일부, 외천리 일부, 소제리 일부를 편입)
- 1926년: 대전면(외남면의 발암리, 신대리, 소제리, 연효리,대동리, 대사리, 부사리, 외천리 일부를 대전면으로 편입)
- 1931년: 대전면->대전읍 승격
- 1932년: 대전면:외남면의 방축리, 대사리, 부사리, 유천면의 용두 · 평리(하평) 편입 (충청남도 도청 이전(공주→대전))
- 1935년: 대전읍->대전부 승격
- 1940년: 대전부:외남면의 산소리 · 용방리 · 탁곤리 · 가양리 · 홍도리, 산내면의 석교리,유천면의 평리 일부(상평), 유천리, 과례리 및 당대리 편입(면적: 35.71㎢)
광복 이후
- 1949년 : 대전부->대전시
- 1963년 : 대전시: 대덕군의 유천면 전역과 회덕면의 대화 · 오정 · 용전리,산내면의 옥계 · 삼정 · 가오 · 호동리를 편입 (면적: 88.21㎢)
- 1983년 : 대전시:대덕군 유성읍과 회덕면 전역, 구즉면의 원촌 · 문지 · 전민 · 용산리 일부, 탄동면의 신성 · 가정 · 도룡 · 장동 · 내동 · 화암 · 덕진 · 하기리, 기성면의 관저 · 도안 · 가수원리, 진잠면의 내동 · 교촌 · 대정 · 용계·학하리를 편입 행정 구역 확대
- 1987년 : 대전시: 대덕구 진잠면 계산리 일원을 대전시 중구에, 중구 삼천동 일부를 동구 오정동에, 동구 오정동 일부를 중구 중촌동에 편입
- 1989년 : 대전시->대전직할시 (대덕군 전역 편입과 함께 대전직할시가 됨(진잠면 남선리 제외) (면적: 540㎢)
- 1995년 : 대전직할시->대전광역시 개칭
- 2024년 12월말 기준 : 5구 82행정동[24]
- 구(5개): 동구,중구,서구,유성구,대덕구
- 동구(136.7㎢, 16개 동): :중앙동, 신인동 ,효동, 판암1동, 판암2동, 용운동, 대동, 자양동, 가양1동, 가양2동, 용전동, 성남동, 홍도동, 삼성동, 대청동, 산내동
- 중구(62.2㎢, 17개 동):은행선화동, 목동, 중촌동, 대흥동, 문창동, 석교동, 대사동, 부사동, 용두동, 오류동, 태평1동, 태평2동, 유천1동, 유천2동, 문화1동, 문화2동, 산성동
- 서구(95.5㎢, 24개 동): 복수동, 도마1동, 도마2동, 정림동, 변동, 용문동, 탄방동, 둔산1동, 둔산2동, 둔산3동, 괴정동, 가장동, 내동, 갈마1동, 갈마2동, 월평1동, 월평2동, 월평3동, 만년동, 가수원동, 도안동, 관저1동, 관저2동, 기성동
- 유성구(176.6㎢, 13개 동): 진잠동, 학하동, 원신흥동, 상대동, 온천1동, 온천2동, 노은1동, 노은2동, 노은3동, 신성동, 전민동, 구즉동 , 관평동
- 대덕구(68.7㎢, 12개 동):오정동, 대화동, 회덕동, 비래동, 송촌동, 중리동, 법1동, 법2동, 신탄진동, 석봉동, 덕암동, 목상동
참고문헌
교통
조선시대
- 대동지지 정리고 교통로
- 대전광역시는 조선시기에 공주목 유성현·회덕현·진잠현에 속했다.
- 해남대로는 대전시로 가면 덕평점에서 분점되기 시작하여 동쪽으로 10리를 행진하여 전의에 도착하면서 2가지 방향의 지선이 분리됨.
- 1차 지선(남쪽으로 진잠현): 전의(15리)->송현(25리)->연기(15리)->나리진(고개, 조선에 공주)(15리)->내성령(조선에 공주)(20리)->삽치(고개, 조선에 공주)(10리)->진잠(지선 1차, 행정, 진잠 10리, 경 350리, 현 진잠향교 근처)
- 2차 지선(남동쪽으로 회덕현): 전의(20리)->갈기리(20리)->미곷강(30리)->얼어리(촌락, 조선에 충청_문의, 현 세종시 전동초등학교 근처 예측 비정)-(30리)>두저포(포구,조선에 충청_문의)-(20리)>회덕(행정: 면사무소심볼, 경성까지 340리, 현 회덕초등학교 일대)
근대
- 철도
- 경부선(1905)
- 호남선(시발점, 1914)
현대
- 고속도로
- 경부고속도로(1970): 1번 국도- 호남고속도로지선(2001): 251번 국도
- 호남고속도로(1973): 25번 국도
-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1999): 300번 국도
- 통영대전고속도로(2005): 35번 국도
- 서산영덕고속도로(2009): 30번 국도(2009년 5월 28일: 당진JC - 유성JC 구간이 개통되었다.)
- 철도: 대전역, 서대전역
- 대전지하철(도시철도)[27]
- 1호선: 2007년 4월 17일에 개통, 연장 22.74㎞, 22개 역
- 1991년 도시철도건설계획 수립 시작
- 1994년 1월 지하철기획단 설치
- 1996년 2월 지하철건설기본계획 확정 (구도심-신도심 연결)
- 1996년 4월 지하철건설본부 발족
- 1996년 10월 대전지하철 1호선 건설 착공
- 2006년 3월 16일 1단계 구간 개통 (판암∼정부청사, 10.7㎞)
- 2007년 4월 17일 2단계 구간 개통 (정부청사∼반석, 9.7㎞)
- 동구 판암(대전대)역에서 신흥, 대동(우송대), 대전역, 중앙로, 중구청, 서대전네거리, 오룡, 용문, 탄방, 시청, 정부청사, 갈마, 월평(한국과학기술원), 갑천, 유성온천(충남대 · 목원대), 구암, 현충원(한밭대), 월드컵경기장(노은도매시장), 노은, 지족(침신대),유성구 반석동의 반석(칠성대)역까지
- 1호선: 2007년 4월 17일에 개통, 연장 22.74㎞, 22개 역
- 시외/고속버스: 13개
- 대전 복합터미널, 대전서남부터미널, 유성 시외버스 정류소, 둔산 시외버스 정류소, 둔산 고속버스 정류소, 신흥동 시외버스 정류소, 부사동 시외버스 정류소, 도마동 시외버스 정류소, 도룡동 고속.공항버스 정류소, 유성 금호고속 영업소, 관저.건양대병원 시외버스 정류소, 자운대 고속, 시외정류소, 북대전IC 시외버스정류소[28]
주요 인물
- 송시열(宋時烈) (1607∼1689) [29] [30]
- 본관: 은진(恩津)
- 아명 : 성뢰(聖賚), 자 : 영보(英甫), 호 : 우암(尤菴)
- 출생지: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천
- 특징: 조선후기 문신(文臣), 도학가(道學家)·정치가.
- 관련 유적
- 우암사적공원(남간정사)(대전 동구 충정로 53 남간정사): 송시열은 학문을 닦던 곳으로 1991년부터 1997년까지 1만 6천여 평에 장판각, 전시관, 서원 등 16동의 건물을 복원해 사적공원으로 새롭게 탄생. 이곳은 선생이 말년에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에 정진하던 남간정사, 건축미가 뛰어난 기국정, 송시열 문집인 송자대전판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재가 보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공원 곳곳이 잘 단장되어 있어 도심 속 시민들의 쉼터로도 제격.
- 송준길(宋浚吉)(1606∼1672) [31]
- 본관: 은진(恩津)
- 호 : 동춘당(同春堂), 시호(諡號) : 문정(文正)
- 출생지: 서울 정릉
- 특징: 문신(文臣), 조선예학(朝鮮禮學)의 대가(大家)
- 관련 유적
- 동춘당(同春堂) : 송준길(1606∼1672)선생의 별당(別堂).'동춘'은 '늘 봄과 같다.'는 뜻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씀.
- 송시열은 여덟살 때부터 친척되는 송이창(宋爾晶)에게서 글을 배움. 송이창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아버지인데 그때부터 공은 자기보다 위인 송준길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일생을 두고 학문과 정치 생활에 있어 그와 고락을 같이 하는 사이가 됨.
- 이은농(李應魯)(1904~1989)[32]
- 본관: 전의(全義,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
- 호: 죽사(竹史), 고암(顧菴), 고암(顧庵)
- 출생지: 충청남도 홍성
- 특징: 한국근대미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한국화가
- 관련 장소
- 대전광역시 이응노미술관
- 신채호(申采浩)(1880~1936)[33]
- 본관: 고령(高靈)
- 호: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재(丹齋);
- 필명: 단생(丹生),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열혈생(熱血生), 한놈, 검심(劍心), 적심(赤心), 연시몽인(燕市夢人), 유맹원(劉孟源)
- 출생지:대덕군 산내(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
- 특징: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하였고, 대한매일신보 주필로서 항일언론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한국사 연구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힘쓴 사학자 · 언론인 · 독립운동가.
- 관련 장소
- 단재신채호선생생가지(丹齋申采浩先生生家址),대전 중구 단재로229번길 47 (어남동)
농특산물
- 유성구: 벼, 배, 델라웨어 포도, 한우, 오이, 토마토, 상추, 화훼
- 서구: 벼, 한우, 토마토, 딸기
- 중구: 부추, 비름, 토마토
- 동구: 델라웨어 포도, 캠벨얼리 포도, 복숭아
- 대덕구: 복숭아, 벼, 오이
문화유산
사적
- 대전 계족산성 (大田 鷄足山城) [35]
- 소재지 : 대전 대덕구 장동 산85번지 외
- 시대 : 신라, 백제
- 지명유래 : 산줄기가 닭발 모양으로 퍼져 나갔기 때문에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지명 유래와 관련해 예로부터 가뭄이 심할 때 이 산이 울면 비가 온다고 전하여 비수리·백달산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하고, 산의 생김새가 봉황과 같다고 하여 봉황산이라했다고도 함.
- 참고문헌 : 지명유래집.충청편.대전광역시.자연지명.101쪽
보물(건축물 중심)
- 대전 회덕 동춘당(大田 懷德 同春堂)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소재지 : 대전 대덕구 동춘당로 80 (송촌동)
- 시대 : 조선시대
- 통영 측우대(統營 測雨臺)
- 분류 : 유물/과학기술/계측교역기술용구/도량형
- 소재지 : 대전 유성구 대덕대로 481, 국립중앙과학관 (가정동)
- 시대 : 조선시대
- 대전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大田 飛來寺 木造毘盧遮那佛坐像)
- 분류 : 유물/불교조각/목조/불상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골길 47-74 (비래동)
- 시대 : 조선시대
부분 조선시대 역사지도집
- 회덕현
- 진잠현
지명유래
- 지명유래 이야기:
- 계족산 (雞足山)/비수리·백달산/봉황산
- 산줄기가 닭발 모양으로 퍼져 나가서 계족산이라 함.
- 가뭄이 심할 때 이 산이 울면 비가 온다고 전하여 비수리·백달산이라 부름.
- 문헌기록: 계족산-『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회덕읍지』『여지도서』『충청도읍지』『호서읍지』『해동지도』『1872년지방지도』
- 보문산 (寶文山)[36]
- 일설에 보물이 묻혀 있다 하여‘보물산’이라고 불리다가 보문산으로 바뀜.
- 문헌기록:보문산-『대동지지』(공주),『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
- 지명 전설
- 우화형:농부가 가뭄에 목마른 두꺼비에게 물을 주었고, 다음 해 두꺼비가 보물 접시를 선물로 가져왔다. 접시는 담뱃재나 동전을 넣으면 가득 차는 신비한 능력이 있어 농부를 부자로 만들었다. 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아들들의 탐욕을 염려한 농부가 접시를 뒷산에 묻던 중 숨져 버렸고, 이후 접시는 발견되지 않아 그 산을 보물산, 즉 보문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 효자형:효성스러운 나무꾼이 죽어가던 물고기를 구해주자, 그 자리에 '은혜를 갚는 주머니'가 남겨져 있었다. 주머니는 동전을 넣으면 돈이 쏟아져 나와 나무꾼을 부자로 만들었다. 이를 탐낸 형이 주머니를 빼앗으려 다투다 주머니가 땅에 떨어졌고, 화가 난 형이 주머니를 짓밟아 흙이 들어가자 흙이 끝없이 쏟아져 큰 산을 이루었다. 이 산이 보물산, 즉 보문산이 되었다.
- 도승형:한 스님이 가뭄에 시달리는 용왕을 도와주자, 용왕이 그 답례로 '복조리'를 주었다. 스님은 가난하지만 착한 한 부인에게 복조리를 건네주었고, 부인은 복조리에 쌀과 엽전을 넣어 헤아릴 수 없는 재물을 얻어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자식들이 복조리를 차지하려 싸우자, 부인이 강변 모래에 복조리를 묻었고, 조리에 모래가 들어가 모래가 쏟아져 큰 산을 이루었다. 이 산이 보물산, 즉 보문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밀암산(密岩山)/밀암산고성(密岩山古城): 불명, 흑석동산성의 속칭
- 보통 흑석동을 하면 검은 돌이라고 함. 여기서 옛날 원래 ‘금평’이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인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명당이 있는 들이라는 뜻에서였다. 이러한 금평의 한국말은 거문고들이었고, 거문들이 이후 검은 돌로 와전되어 흑석이라는 한자명으로 자리 잡게 되었음.[37]
- 문헌기록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충청도(忠淸道)): 밀암산고성(密巖山古城) (속칭 미림고성(美林古城)이라 한다)
- 『여도비지』:밀암산, 밀암산고성, 미림고성(美林古城)
- 『대동지지』:밀암산, 밀암산고성, 미림고성(美林古城)
- 『대동여지도』:밀암산, 밀암산고성
- 지명 전설
- 흑석동의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 명당설
- 『삼국사기』에 ‘강가에 있으면서 높고 험하다’라고 묘사된 것으로 보아 나당연합군과 백제 부흥군의 격전지로 유명한 진현성(眞峴城)으로 비정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나당연합군이 이곳을 함락하여 신라의 식량을 운반하는 길을 확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38]
- 갑천(甲川): 선암천(船巖川), 성천(省川), 대천(大川), 개수천(介水川)
- 갑(甲)’은 십간(十干)의 첫 번째명칭으로‘제 일의’또는‘첫 번째’라는 의미를 갖는 말이다.
- 문헌기록
- 신증동국여지승람』(회덕): 선암천(船巖川)
- 『동국여지지:갑천
- 『여지도서』:갑천
- 『회덕읍지』(18세기 중반):갑천
- 『공산지』(1859):갑천
- 『대동지지』:갑천
- 『호서읍지』:갑천
- 『해동지도』(진잠): ‘대천(大川)
- 『1872년지방지도』(진잠): ‘개수천(介水川)
- 지명 이야기
- 붙여진 이름을 보더라도 갑천은 이 지역의중심 하천으로 그 규모나 상징적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다. 조선 후기 이중환의『택리지』에도 들판에 자리 잡은마을 중 당시 공주목에 속한 갑천이 제일의 살 만한 곳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 정민역(貞民驛)
- 호구총수』(회덕)에‘역촌리(驛村里)’와‘정촌리(貞村里)’라는 지명이 확인되는데 이들은 정민역에 속했던 두개의 자연마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오해하여 전민(田民)이라 잘못 표기하고 있음.
- 문헌기록
- 『세종실록지리지』(회덕): 정민역(貞民驛)
- 『신증동국여지승람』:정민역
- 『여지도서』(회덕):정민리(貞民里)
- 『조선지지자료』(회덕):전민역(田民驛)
- 『광여도』(회덕): 전민역(田民驛)
- 개수원(介水院)
- 구봉산을 뒤로 하고 전면에 갑천을 둔 지역으로서 마을 앞의 냇물이 아름다워 가수원(佳水院)이라 불렀다는 유래가 있음. 과거에 이 일대에서 구봉산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과거부터 용소리·사거리·새말 등의 자연마을을 통칭하여 가수원이라 불렀다고 하며 개수원(介水院)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음.
- 문헌기록
- 『여지도서』(진잠):구봉산과 함께‘개수원평(介水院坪)’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 『호구총수』(진잠):개수원리(介水院里)
- 『1872년지방지도』: 분수원(分水院)/갑천을‘개수천(介水川)
- 『대동여지도』:개수원(介水院)’
- 『조선지지자료』:‘가수원리(佳水院里), ‘가수원장(佳水院)
- 지명 논의: '원'을 붙인 지명은 역과 같이 교통로와 관련성이 더 크다.
- 계족산 (雞足山)/비수리·백달산/봉황산
- 참고문헌
- 국토지리정보원, 2009,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39]
지역 이슈
- 도시철도망 3·4·5호선 구축 계획 발표[40]
- 대전·충남 행정통합 논의: 주민 의견 수렴[41]
- 대전시, 5천 가구 대상 2025년 사회조사 실시:‘자녀 출산을 위한 지원 정책’,‘비혼·비출산에 대한 생각’ 등 최근 사회 이슈를 반영한 항목도 포함됐음.[42]
- 대전시, 지역먹거리 지수 평가서 '특별상'[43]
- 대전 '양자산업 메카'로 부상[44]
- 대전교도소 이전[45] [46]
문서 이력
- 2025.11.01 : 관봉매, 문화역사지리현장조사3, 대전광역시 답사 계획서 작성.
각주
- ↑ 국가유산청.계족산성[1]
- ↑ 대전광역시 대덕구.[2]
- ↑ 국가유산청.동춘당.[3]
- ↑ 대전시립박물관.[4]
- ↑ .짐잠향교.[5]
- ↑ .대한민국 구석구석.[6]
- ↑ .나무위키.유성온천.[7]
- ↑ 대전광역시.대전의 지명.[8]
- ↑ 대전광역시.대전소개.[9]
- ↑ 대전광역시.대전의 통계(2025.12.16검색).[10]
- ↑ kosis.서울 인구.[11]
- ↑ 대전광역시.대전의 통계(2025.12.16검색).[12]
- ↑ 대전광역시.대전의 현황(2025.12.16검색).[13]
- ↑ 대전광역시. [14]
- ↑ .한국의 발견.충청남도.대전시
- ↑ .규장각 지리지 종합정보.회덕읍지(懷德邑誌).[15]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회덕.[16]
- ↑ .대전광역시 대덕구.대덕의 역사.[17]
- ↑ .규장각 지리지 종합정보.[호서]읍지([湖西]邑誌).진잠.[18]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진잠.[19]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유성.[20]
- ↑ .유성구청.주요연혁.[21]
- ↑ .유성구청.주요연혁.[22]
- ↑ 대전광역시.행정구역.[23]
- ↑ 대전광역시.대전의연혁. [24]
- ↑ 국토지리정보원, 2009,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68쪽.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전지하철 (大田地下鐵).[25]
- ↑ .대전시 교통정보센터.[26]
- ↑ 대전시립박물관.대전의 인물.송시열[27]
- ↑ 대전시 동구청.관광명소.[28]
- ↑ 대전시립박물관.대전의 인물.송준길.[29]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응노[30]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채호[31]
- ↑ .농업인신문.[32]
- ↑ 국가유산천.대전시[33]
- ↑ .중구문화관광.[34]
- ↑ 대전시 서구.bolg.[35]
- ↑ 위키백과.흑석동 산성.[36]
- ↑ 국토지리정보원, 2009,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 ↑ .대전시.보도자료.대전시 도시철도망 3․4․5호선 포함 63.43km 노선 공개.[37]
- ↑ .대전시.보도자료.[38]]
- ↑ .대전시.보도자료.[39]]
- ↑ .보도자료.[40]]
- ↑ .서울경제.보도자료.[41]]
- ↑ .보도자료.[42]]
- ↑ .보도자료.[43]]